만약 ‘연애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녀는 어렵지 않게 학위를 딸 것 같다. 젊은 여자들이 예쁜 연애에 발만 담그려 말고 질퍽한 연애의 참맛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캣우먼’ 임경선. 칼럼니스트이자 카운슬러이기도 한 그녀의 거침없는 입담과 경쾌한 글 솜씨는 꽤 알려져 있다. 3년째 KBS FM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 폐부부터 찌르는 카운슬링으로 인기도 얻었다. 어릴 적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고, 왕년에 연애도 좀 했고, 10년 넘게 마케터로 회사 생활을 했던 경험 때문일까. 식상한 결론에서 벗어나지 않는 여타의 상담과는 결이 확 다르다.
임경선의 첫 연애소설 『어떤 날 그녀들이』는 딱 요즘 여자, 남자의 비루하고 치사하고 때론 음흉한 사랑 풍속도를 그렸다. 핑크빛 로맨스 같은 건 절대로 없다. 9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대개 탄탄한 직업을 가진 30대 안팎의 어른아이들이 매뉴얼이란 게 없는 ‘연애질’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심히 우왕좌왕하는 ‘리얼’ 러브스토리다. 생생한 에피소드 중심의 소설집이라 읽다 보면 ‘아니, 이 연애 삽질은 바로 내 얘기’라며 가슴 뜨끔해지기 십상. 판타지를 걷어 낸 당도 100%의 연애소설, 이거 은근히 레어 아이템이다.
표지 일러스트가 참 예쁘다. 머리 끈을 질끈 묶는 이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
아는 동생인 일러스트레이터 조성민한테 부탁했다. 걸리시한 느낌이 싫어서 중성적인 감성을 낼 수 있는 남자 일러스트레이터랑 작업했다. 내가 주문한 게 ‘전날 밤 남자랑 자고 다음날 일어나서 많은 상념을 지닌 채 출근 준비를 하는 여자’를 그려달라는 거였다. 약간 중성적인 취향을 가졌지만 섹시함을 가지고 있는 여자, 하의 실종 컨셉의.(웃음) 결과적으로 참 마음에 든다. 좀 싸한 느낌이 있지? 중요한 건 중성적인 느낌이라는 거다. 상담을 할 때도 그렇지만 ‘내가 여자니까 여자편을 든다’, 그런 건 아니라고 본다. 공정하게 상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밸런스를 잡는 게 중요하지 않나. 또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만큼 남자도 좋아하고.(웃음) 제목엔 ‘그녀들이’라고 했지만, 남자들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분들이 많더라. 그런 부분이 굉장히 기분 좋다.
책에 실린 9편의 단편이 다 다른 연애담인데도 꼭 장편소설 한 편을 쪼개 놓은 것처럼 연관성이 느껴지더라.
연애 문제의 핵심, 가장 내가 흥미로워하는 연애 이슈 9개를 뽑은 거다. 예를 들어, ‘난 왜 이렇게 애인이 안 생기나’라고 물으신다면 난 솔직히 그런 걸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웃음) 난 연애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루한 마음이랄까, 갈등이 생겼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자신의 한계와 그걸 극복하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가령, 첫 번째 단편 <도쿄 만감>에 연하남이 등장한다. 그런데 연하남 코드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엔 ‘동종 증오’ 같은 것도 깔려 있다. 나이만 대충 먹은 한 ‘찌질’한 여자가 나이 어린 ‘찌질’한 연하남이랑 연애를 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벗어나려고 하는 거지. <달팽이 껍질 속 사랑>은 불륜을 다루는데, 사실 불륜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들은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또 맞고. 가장 불륜할 것 같지 않은 스타일의 여자가 불륜을 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연애 이슈들만 모아서 스토리를 만들어 봤다. 아무래도 거기에는 내 개인적인 경험들도 들어갔겠지. 그 과정에서 장편화됐다가, 나처럼 여자들의 사연을 들어주는 여자가 화자가 됐다가, 릴레이 장편이 됐다가, 결국 싹 바꿔서 이야기를 분해시켜 지금의 단편들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틀을 뒤집는 과정만 한 4, 5차례 한 것 같다. 어깨에 힘 빼고 내가 재미있게 쓸 수 있는 방식이 지금의 소설 형식이었다.
그 동안 상담에서 말이나 글로 풀어서 했던 얘기들을 소설이라는 틀을 빌려 하는 게 흥미로웠다.
워낙 재미있는 화두니까. 이게 단순히 연애 문제만이 아니다. 이제 연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돼 가고 있거든. 사회가 팍팍하니까 사람들이 요새 연애도 마음대로 못한다. 늦게 학교를 졸업해서 취업도 늦게 해, 그래서 성인이 되는 시기가 너무 늦다. 거의 서른쯤 돼야 그 시기가 오는데 그제서야 정신차리고 남자를 찾으려고 하니 늦는 거다. 20대에 어영부영 하다가 연애 못해 봤어요, 이런 친구들 천지다. 완전 부작용인 거지. 어쨌든 커버 일러스트가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을 이야기한 건데, ‘네가 연애를 하던, 뭘 하던 간에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다. 혼자 힘으로 씩씩하게 네 인생을 걸어가라’는 거지. 머리끈을 질끈 묶듯 힘 딱 주라는. ‘네가 혼자일 수 있어야만 남자랑도 좋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어떤 날 그녀들이』처럼 칙릿소설이 아닌 본격 연애소설은 의외로 보기 드문 것 같다.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그 동안 나온 연애소설이 주로 연애에 골인하기 전까지의 과정을 담았지 않나. 난 연애에 있어서 그 지점은 전반전도 아니고 아예 시작도 안 한 거라고 본다. 솔직히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연애할 때 가장 중요한 시점은, 둘이 엮어서 한참 좋은 두세 달이 지난 후부터 헤어질 때까지 애매모호한 시기, 바로 그 시기다. 서로의 한계도 알게 되고, 진짜 개인의 기량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기거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품고 갈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진짜 연애의 기간. 왜냐하면 그 때 사람이 가장 치졸하고, 비루하고, 비열해지기도 하고, ‘리얼’이 되거든. 그 전까지는 사실 판타지의 시기지.
그래서 관계의 디테일, 연애의 리얼리티가 이렇게 살아 있나 보다.
전경 묘사 같은 게 없어서 빨리 읽힐 거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 걸 잘 못 쓰기도 하고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콤플렉스이기도 한데. 어쨌든 일반적인 소설의 유형을 따르려고 안 하고,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얘기만 했다. 어쨌든 리얼리티는 있을 거다, 아마. 그 리얼리티가 훨씬 더 독할 거고. 연애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은 친구들끼리도 제대로 얘기를 안 하거든. 그리고 내가 봤을 땐, 아직까지 우리나라 여자들이 연애의 전반전 그러니까 초보 단계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깊게 들어가려고 하질 않는다. 좋게, 예쁘게, 모나지 않게 연애해서 집에서도 반대 안 하는, 안전한 연애를 갈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굉장히 질퍽한 연애를 하고 있거든. 몸 사리면서 예쁜 연애만 하는 건, 어후.
‘어떤 날 그녀들이’란 제목은 어떻게 정했나?
‘어떤 날’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좋아한다. ‘어떤 날’이라는 그룹도 좋아하고.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의 하나가 논챌런트(nonchalant)라고 ‘차분한, 태연한’ 태도를 말한다. 무시하고 경시하는 게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경쾌하고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소화하는 능력인데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으로 짓고 싶었다. 유머 감각이랑도 연결돼 있고 굉장히 멋있는 태도다. 자신의 의지로 열심히 살면서 그것에 대해 과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맨발로 바닷가 걷듯이 사는 힘이 있는 그녀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드라마 여주인공화 시켜서 희생자라느니, 왜 이런 남자들만 걸리느니 하며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약자 취급하지 않는 여자들을.
단편 속 주인공들이 거의 연애만큼은 잘 안 풀리는 30대 안팎의 전문직 여성들이다.
내가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최소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여자들이 연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일을 잘한다기 보다도 열심히 살고 올곧은 여자들을. 연애가 무조건 우선순위인 여자들은 별로다. 일을 잘 해야 연애도 잘 할 수 있고,자기 생활을 가지고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독립적인 여자여야 좋은 연애를 할 수 있다. 또 내가 봤던 재미있는 애들 중에 일은 프로인데, 연애는 영 황인 애들이 많았다. 연애는 아마추어라 서툴러서 꼭 일처럼 하려고 든다, 불도저처럼. 그런 약간의 괴리가 재미있다. 일에서는 양성평등적이고 저돌적인데 연애문제만 나오면 한국의 보수적인 전통가치를 가진 여자의 매너리즘에서 못 빠져 나오는 거야. 그것에 대한 속상함 때문에 일적으로 유능한 여자들을 많이 등장시켰다.
자기를 표현하면서 사는 일은 축복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DJ, 작곡가 유희열 씨가 쓴 추천사 인상적이더라. ‘너의 글 덕분에 쓸 수 없을 것 같던 사랑 노래를 다시 만들고 싶어졌다. 고마워. 난 정말정말 네 글 좋아’라니.
정말 '스윗'하지 않나? 추천사 대박이지.(웃음) 고맙더라고. 내가 희열 씨한테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추천사인 것 같다. 3년째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고민 상담 코너에 출연하는데 게스트지만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는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서로 힘을 주는 스탭들이 있고, 개인적으로 유희열 씨한테 태도나 자기관리 면에서 배울 점도 많고. 희열 씨는 정말 잘 큰 남자어른이거든. 그게 정말 중요하다. 여자들은 나이 들수록 주변에 얼마나 잘 성장한 남자어른들이 있느냐가 인생의 질을 좌우하거든. 안 그러면 여자들이 팍삭 아줌마 되고 마는 거다.
사람들의 고민 사연을 받아서 상담해 주는 칼럼을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별로 감정개입을 안 한다, 나는. 고민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감정노동을 한다기 보다 어떤 이슈에 대해 내 의견을 얘기한다는 생각이지, 내가 어딜 감히 남한테 조언을 하겠나. 내가 전문적으로 상담을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 상담 메일은 받지만 개인적으로 답변 메일은 보내지 않는다. 방송이나 칼럼을 통해서 걸러진 상태로 답변을 할 뿐. 1: 1로 하는 건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돈 줄 테니 만나달라, 이런 분들도 있지만 실제로 만나진 않는다. 거꾸로 얘기하면 내 이야기, 내 생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글의 방법,유형이 상담인 거다.
사람들이 주로 어떤 고민 사연을 보내나?
주로 여자들인데 제일 많은 게 ‘조건이냐, 사랑이냐’ 테마다. 지금 남자친구가 좋은 데 취업이 안 된다거나 해서 경제적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고, 그래서 결혼하긴 좀 애매하다. 그런데 조건은 좋은 데 마음은 안 가는 남자가 나타난 거지. 갈수록 그런 사연이 많아진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안 좋다. 이게 사회 문제랑 엮여 있는 거거든. 집 마련하는 문제부터, 취업 문제 등등이. 연애를 사회문제랑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내가 연애 칼럼 쓰는 걸 재미있어하는 것도 그래서다. 사회 문제, 자아 문제랑 맞닿아있거든. ‘이성을 꼬시는 잔기술’ 같은 건 연애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진짜.
개인 홈페이지(러브패러독스 www.catwoman.pe.kr)도 인기가 많다. 특히 게시판(FREETALK) 부분이 재미있다. 게시글도 하루에 몇 십 개씩 올라오고 회원들끼리 답변도 하고. ‘요즘 무슨 책을 읽을까’부터 ‘회사 상사와 부하직원간의 문제’, ‘어떤 호텔이 갈 만한가’까지 질문도, 답도 스펙트럼이 넓다.
그러게, 활성화 됐다. 물 약간 좋다. 첫 책 홍보하려고 2001년에 만든 사이트인데 벌써 10년이 됐네. 자주 오는 사람들도 1기, 2기, 3기 이런 식으로 바뀌면서 왔다갔다 한다. 닉네임 보면서 서로 막 반가워하고 그런다. 그 안에서 만나서 결혼도 하고 그러는데 뭐. 가끔 정모하면 100명씩 오고. 나도 정모에 나가서 1차만 있다 오고 하는데 진짜 사람들이 다들, 평균 이상이다. 특히 여자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다들 연애 문제에선 나사 하나 빠진 사람들.(웃음)
육아, 살림과 칼럼니스트, 방송 활동 등을 병행하는 건 힘들 지 않나.
그래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애쓴다. 일단 좋은 어린이집을 만나서 딸을 보낼 수 있고, 살림도 욕심 안 내고 최소한으로 한다. 그래도 어쨌든 연재물 하면서 대충 꾸려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주변에서 많이들 부러워한다. 애는 내가 주 양육자지, 살림하면서 돈도 벌지,하고 싶은 일은 다 하지. 어쩔 때는 ‘나도 괜찮구나’ 싶은데 어느 순간에 균형을 잘 못 잡으면 힘들어진다. ‘내가 왜 이걸 혼자 다 해야 돼’ 싶어지거든.
아, 부지런하시네.
부지런하다기 보다 회사 생활을 12년 동안 한 게 컸다. 보수적인 회사에서 12년간 일 한 게 자기 스케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용한 밤이 돼야 글이 써진다, 그런 거 없이 회사 업무처럼 시간 안에 내가 할 일 다하고, 글 쓸 것 쓴다. 어떤 상황이든 일을 할 수 있는 모드로 들어갈 수 있는 훈련이 잘 돼 있는 것 같다.
회사를 다니다가 칼럼니스트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간략하게 프로필을 얘기하면, 학교에선 정치학을 전공했다. 졸업하고 조선호텔 홍보실에서 진주 귀걸이 하고, 힐 신고 일했다. 내가 가장 조숙하게 입고 다녔던 때다, 스물 세 살에.(웃음) 그렇게 시작해서 음반사 마케팅, 광고대행사 AE, 인터넷 회사 마케팅, 마지막으론 두산그룹에서 마케팅을 했다. 그러다 2005년에 갑상선 수술 받고 몸이 안 좋아져서 그 계기로 회사 그만두고 애 가질 준비를 했지. 이미 부업으로 칼럼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일 할 수 있는 칼럼니스트로 전향을 한 거지.
재미있는 에세이를 쓰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서 그런지 『무라카미 라디오』같은 보송보송한 느낌의 에세이집을 내고 싶다.퍼지한 느낌의, 소설 같은 느낌의 에세이를.
작가로서 혹은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내가 30대 중반에 일을 확 바꾼 이유가 인생 이모작이랄까. 회사 생활을 계속 했으면 고위직에 올라서 일 보다 다른 거에 신경 써야 했을 텐데 그건 별로 내가 원치 않는 거였다. 어쨌든 글 쓰는 일을 하면, 내가 통제할 수 있고 오래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명은 좀 줄 수 있겠지만.(웃음) 자기를 표현하면서 사는 일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의 가능성이 주어진 만큼 그 마음을 소중히 품고 계속 노력하고 분투하는 자세로 살려고 한다. 내가 하는 것만큼 정직한 성과가 보이고, 내 발이 땅 위에 닿아 있는 느낌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천천히 걸어가는 인생을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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